서대문 형무소

 

독립운동의 축소판

 

2편

 

 

 

안녕하세요!

서대문형무소 2편으로 찾아왔습니다.

 

2019년 11월 17일인 오늘은

순국선열의 날인데요.

 

순국선열의 날을 맞이하여 그와 관련된

포스팅을 통해 함께 순국선열분들을

기리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서대문 형무소 2편은 각 건물들에 대한 소개해

드리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현재는 서대문형무소 역사실로 사용되고 있는

보안과청사 건물입니다.

 

보안과청사 건물은 1층, 2층에서는 형무소 역사실, 민족저항실을

지하 1층에서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애국지사들을 고문했던

장소로서 고문실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서대문형무소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분들의

수형기록카드로 한 공간을 전시해 놓은 장소입니다.

이 공간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전시관을 둘러보면서 일제가 

독립운동가분들에에 행한 치욕적이고 고통을 줬던 흔적들을

보고 왔기때문에 매우 막막한 기분으로 이 공간을

감상했었습니다. 또한 이 곳에 남겨진

모든 많은 독립운동가분들을 내가 다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에

죄송스러웠고 다시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왔던 것 같습니다.

 

 

 

유관순 열사 / 이육사 시인 수형기록카드

 

 

 

수형기록카드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등록문화재 제 730호

 

일제강점기 시기 그들의 관점에서의 '사상범'이라 분류되었던

독립운도악 분들의 감옥 수감 상황과 일부 수배자와 요시찰 인물을 기록한

낱장의 종이 재질로 된 카드를 말합니다.

 

가로 15cm, 세로 10cm 한장에

앞과 뒷면으로 사진과 신상정보와 수형사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총 6,264매 중 중복된 기록을 제외하면

4,837명, 이 중에서 179명의 여성 독립운동가분들의

수감카드도 발견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기의 가장 중요하게 치급했던 죄는

식민지 체제에 반대하고 일제가 구축해 놓은

사회질서를 무너뜨릴 여지가 있는 행위로 인식했던

'사상범죄' 였습니다.

보안법, 소요, 제령7호, 불경, 출판법, 치안유지법,

폭력행위 처벌에 관한 법, 촉발물 취제법,

안녕질서에 관한 법 위반 등이 '사상범죄'로 분류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상범들은 일제의 기준일 뿐

우리에겐 그저 일제의 법률를 위반한

항일 독립 운동가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상정보와 수형사항을 기록해 놓은 것이 바로

수형기록카드입니다.

서대문형무소 1편에서도 언급한 적 있듯이

직업과 신분 성별을 뛰어넘어 모든 대한의 사람들이

대한 독립 운동을 외쳤던 3·1운동 이후

수많은 독립운동가분들이 서대문 형무소로 수감되었습니다.

수형기록 카드 역시도 3·1운동을 기점으로

독립운동가 분들을 관리,감독하기 위한 방편으로

1919년부터 본격적으로 작성되었다고 합니다.

수감자의 사진, 이름, 나이, 보적과 주소, 지문번호 등의 기본신상 정보와

죄명과 형량, 언도 재판소, 입출소일, 집행감옥 등이

수형기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수형기록카드는 독립운동가 분들 중

국가유공자로서 서훈 받지 못하신 분들을 찾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시로 배화여학교에서 3·1운동 1주년 기념 독립만세운동을 펼쳐

수감 되셨던 김경화, 박양순, 성혜자, 소은명, 안옥자, 안희경이란 성함을 가지신

6분의 독립운동가 분들입니다.

6분의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최근 카드를 통해서 발견한 행적이

적극적으로 제시 되어 2018년 8월 15일 국가 유공자로서 당당히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수형기록카드가 앞으로의 독립운동사를 연구할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으며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보관해야 할

자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독립운동가분들이 역사의 기록으로 한자로 남아

전해지길 간절히 바래봅니다.

참고자료 : [일제강점기 작성된 독립운동가들의 수형기록, 문화재로 다가오다]

박경목,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장

 

 

 

 

 

 

 

서대문형무소 역사실 지하로 내려가면

지하 고문실로 사용했던 공간으로 갈 수 있습니다.

독립운동가분들을 잔혹하게 고문하며 고통을 주었던

고문이 이루어졌던 곳을 모형으로 재현해 놓은 곳인데요.

이 곳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분들이 취조를 당하고 견디기 힘든

온갖가지 고문들을 당하고 버텨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악명높은 지하고문실이라 수감자들 사이에서 불렸다고 합니다.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과 독립운동 세력을 말살하기 위해서

잔혹하게 취조하고 고문과 구타를 일삼았습니다.

이러한 폭력은 역사적으로 일본이 우리나라로부터 문화를 전수받았고

정치·사상적으로도 우리보다 우수하지 못했다는

열등의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한국인들을 지배하며 유화책을 쓸 수 없었고

무차별적인 폭력을 사용하여 한국인들을 탄압했던 것입니다.

 

 

 

 

 

취조를 하면서 자행한 고문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동료들의

비명조리를 들리도록 구금실과 취조실을 배치하여

심리적인 고통과 공포를 의도하고

물고문, 손톱찌르기고문, 상자고문 등의 잔혹한 고문들로

독립운동가분들의 신체와 정신 모두를

간사하고 잔혹하게 괴롭혔습니다.

이러한 고문으로 인한 흔적과 고통은

독립운동가분들에게 영원히 상처로 기억될 정도록 악랄했습니다.

물리적으로 당한 폭력으로 신체에 남은 흔적

정신적 모멸감으로 뚜렷이 세겨진 정신적 폭력으로 인해서

독립운동가분들은 감옥에서 나와서도

장기 파열과 허파에 물이 차는 흉막염, 뇌진탕 등의 병마에 시달렸습니다.

 

 

 

 

 

 

 

지하독방에 갇힌 독립운동가분들의 모형을

보았을 때, 옆에서 곳곳에서 동료들이 고문을 당하며

고통스러워 하는 소리를 들으며 어떠한 생각을 하고

버티셨을까 한참 생각해 봤습니다.

공포와 심리적 압박감 속에서도 많은 분들이

독립이라는 의지를 꺽지 않고

지금은 생각조차 하지 못할 그 고통을

감내해야 했을 많은 이름 모를 분들을 기억하고 존경하자는 마음을

가슴 한편에 묻었습니다.

 

 

 

 

 

 

 

독립운동가 분들이 당했던 벽관고문이

체험할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초등학생인 동생이 들어가도 답답하고 좁은 곳이었던

장소였는데 성인 남성과 여성이 들어가기도 힘든 곳에서

심지어는 지금은 설치되어있는 작은 창조차도 없었다는

사실에 더 분노했던 장소였습니다.

실제로 체험을 하고서 보는 것은 더욱

큰 분노와 슬픔을 가지고 왔었습니다.

어둡고 좁은 그곳에서 마치 관에 누워있는 것과 같은

심리적인 고문을 자행한 벽관 고문.

실제로 고문을 당하신 한 독립운동가 분의 생생한

고문 육성 기록을 서서 많은 사람들과 보면서야

먼 역사가 아닌 우리 바로 가까이에서 일본에 의해

자행되어던 고통과 분노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배우면서도 멀리 느껴졌던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소름돋으며 신경하나하나에 세겨넣었던 그런 장소였습니다.

제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참담한 심정으로 읽었던 기록 중 하나를 남겨봅니다.

 

···(전략) 얼마 뒤 잡혀 들어온 공산당원 송봉우는 이른바 '비행기 태우기'를 당했다.

비행기를 태운다는 말은 두 손은 뒤로 수갑을 채워 묶고 여기에 밧줄을 이어 천장에 매어다는 것으로 보통 한두 시간씩 계속하곤 했다.

이렇게 하고 난 뒤 뒤로 묶여 굳어진 팔을 잘못내리면 곧잘 부러지곤 했기 대문에 이때에는 두팔을 전문으로 내려주는 잡역이 옆에서 거들어 주었다.

이밖에도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된 것으로 벗겨놓고 가죽채찍으로 매질하는 것, 의자에 묶어놓고 고개를 뒤로 젖힌 뒤 코에 고춧물을 붓는다든가,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리고 구둣발로 짓밟는 등의 방법이 있었다. (후략)···


권영준, 『형정반세기』

입으로도 귀로도 머리로도 생각하고 말하기도 힘들정도로

고통스럽고 두려운 그 과정들 속에서도

독립운동이라는 국가와 국민의 염원을 위해

버티고 싸워주신 많은 분들에게

작은 위로와 감사의 인사를 전달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으로 제가 보답할 수는 없지만

많은 분들의 희생과 나아간 발자취를 하나씩

기억하고 찾아 기록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보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곳이었습니다.

 

 

 

 

 

지하감옥실을 관람하고 보안과청사에서 나오면

다음으로 관람하게 되는 곳인

중앙사 건물입니다.

10,11,12옥사와 연결되어서 옥사 전체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2층으로 지어진 건물입니다.

이곳 1층에서 간수들이 사무공간 이용하였고,

중앙사를 통해서 옥사를 출입했습니다.

2층은 전체를 강당으로 꾸며 수감자들을 전향 시키기 위한

교육을 하는 교회당으로 사용했습니다.

 

감옥 소장과 부소장, 간수장, 간수, 작업기사와 보건기사 등 직급별로 통합하여

서대문 형무소를 운영했는데 독립운동가 수감자가 급증하면서

1935년 구치감을 신설하고 감시와 통제가 보다 용이하도록

서무과, 계호과, 작업과, 구치감, 교무과, 의무과의

6개의의 조직을 편성했습니다.

이렇게 운영되었던 서대문 형무소에 운영과 수감자 관리,감독의 실무를

맡아 배치된 간수들은 산수교습소에서 교육을 받은 뒤 배치되었고

서대문형무소에 설치된 연무장과 조선총독부 형무관 연습소에서 지속적인 훈련을

받으면서 식민지 지배도구의 일선에서 감시와 탄압 역할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적합하도록 교육을 받아 배치되었습니다.

 

 

 

 

제레미 벤담의 파놉티콘

 

 

 

근대식 감옥의 구조는 소수의 인원으로 다수의 대중을 통제하기 위해서

설계되었었다고 합니다.

제레민 벤담에 의해 고안된 파놉티콘(Panopticon) 형태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서대문 형무소도 파놉티콘 형태를 본따 중앙간수소를 중심으로 옥사를 부채꼴 모양으로 배치했습니다.

간수가 한 곳에서 모든 곳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좋도록 설계했던 것입니다.

또한 외벽 담장에는 수감자들의 탈주를 막고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서

높이가 10m나 되는 망루를 설치, 감방 벽면에는 시찰공(감시창)을 뚤어서

수감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였습니다.

이러한 형태는 감방 밖에서 간수들이 감방안을 넓게 감시할 수 있었던 반면

감방안에서는 감방 밖의 상황을 전혀 알 수 없게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다음 3편에서 감방에 대한 자세한 정보와 함께

독립운동가 분들이 어떠한 강제노역을 당했는지

노역이 일어난 공작사를 비롯한 다른 남은 건물들에 대해 

소개해 드리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

국권을 빼앗긴 을사늑약이 이루어진 날.

"나라를 빼앗긴 치욕의 날을 잊지 말고 독립의지를 다지며

순국선열의 희생정신을 영원히 기억하자"

-1939년 11월 2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총회-

오늘이 순국선열의 날인만큼 하루동안은

순국선열들을 위한 추모와 기억을 가지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도 제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하루 보내세요!!

 

그럼 다음 3편에서 다시 만나 뵙겠습니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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