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학의 거인

 

 

 

 

1859년 9월 30일 황해도 황주 태생의

백암 박은식 

 

일제강점기의 역사학자이자 언론인이었고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일제시기 송상도가 쓴  『기려수필(騎驢隨筆)』에 의하면,

선생의 인상은 중키에 광대뼈가 튀어 나왔으며, 항상 미소 짓는 얼굴에 관후하고 소탈한 성품이었다.

어려서부터 선생은 부친의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는데, 재주가 뛰어나고 시문에 능하여 동네 신동으로 불리었다.

당시의 학문이 과거시험 준비에 치중되어 있었지만, 선생은 이에 구애되지 않고 경학은 물론 

제자백가와 불교·기독교의 교리 등도 두루 공부하였다.

그리하여 안중근 의사의 부친 안태훈과 교유함에 이르러서는 이들의 문장을 보고 해서(海西)의 신동이 났다고들 하였다.

 

특히 선생은 1880년에는 경기도 광주(廣州)로 가서 신기영(申耆永)과 정관섭(丁觀燮) 등에게서 학문을 배웠는데,

이들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문인이었다.

이들을 통해 선생은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의 정치·경제·사회 등 제분야의 개혁론을 섭렵하였고,

나아가 지행합일(知行合一)의 관념 체계 아래 현실 문제에 관심이 깊은 양명학(陽明學)을 연구하며 개혁적 사고를 가지게 된것 같다.

이 같은 사상적 배경이 선생을 양반 관료제 사회의 질서를 고집하는 보수적인 성리학의 틀에만 매어 있지 않고, 근대적인 변화와 발전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개신 유학자로 거듭나게 한 것 같다.

 

출처 : 공훈전사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박은식 공적상세 中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시면서

박은식 선생님은 본격적인 민족운동에 뛰어드셨습니다.

 

 

 

독립협회 회보 / 서재필과 독립협회 회원들

 

 

※독립협회

1896년 창립자인 서재필이 서울에서 조직한 사회정치단체로

1896년 7월 2일 독립문 건립과 독립공원 조성을 창립사업으로 하여 발족하였습니다.

 

1896년 7월~1898년 12월에 걸쳐 열강에 의한 국권 침탈과

지배층에 의한 민권 유린의 상황 속에서,

자주국권, 자유민권 자강개혁사상에 의해

민족주의, 민주주의, 근대화운동을 전개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단체 입니다.

 

 

 

만민공동회

 

 

독립협회에 189년 가입한 그 해 3월부터

개화 지식인들과 서울 민중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운동에선 문교 분야의 간부급 지도자로서 활동하셨습니다.

 

 

만민공동회

독립협회가 행한 정치활동의 하나

시민,단체회원,정부관료 등이 참여한 대중집회

1898년 정부의 친러적 정책과 비자주적 외교에 반대하여 일어난 집회.

자주외교와 국정개혁을 주장하는 등의 성과를 보임.

 


 

박은식 선생님은 이후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되면서 

성균관의 교육 기능을 계승한 경학원의 강사와 관립 한성사범학교의 

교사로 봉직하면서 후학 양성에도 이바지 하였습니다.

1904년 7월 양기탁과 영국인 베델에 의해 <대한매일신보>

창간된 후엔 양기탁선생님의 추천으로 주필을 역임하시게 됩니다.

이렇게 백암 박은식 선생님은

언론과 교육활동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셨습니다.

 

 

주필

= 신문이나 잡지 등 정기간행물의 편집 방향과

기사 게재 결정 여부를 주관하는 최고 책임자.

 

 

 

양기탁 / 대한매일신보 / 영국인 베델

 

※대한매일신보

1904년 7월 18일 서울 전동에서 창간된 일간신문

한국어와 영어 양국어로 된 신문으로

영국인 베델(한국성명 배설)을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양기탁을 총무로 창간된 신문.

 


또한 서울 서북협성학교와 오성학교가 개설되고

두학교의 교장을 맡아 본격적인 민족교육을 실처하셨습니다.

그리고 서북협성학교의 분교 설립을 적극 추진하여

1908년부터 1909년 말까지 전국 각지에 63개 지교를 설치하셨습니다.

이를 매개로서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한 신교육을 통한

민족의 실력양성운동에 진력하셨습니다.

 

양기탁, 안창호, 전덕기, 신채호 등이 결성한

전국적인 비밀결사로 계몽운동 단체이자 국권회복운동 단체인

신민회에도 참여하셨습니다.

 

일제가 민족운동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고

식민통치체제의 안정을 위한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서북학회월보등의

애국적 신문과 잡지를 폐간하였고 민족혼이 담긴 간행물들을

금서로 분류하여 발행과 열람을 엄금하였는데

이에  모든 역사서가 압수, 소각되면서

박은식 선생님은 국민과 차세대의 국민들이 한국인으로써의

정체성과 긍지를 상실하지 않을까 우려하셨습니다.

 

 

 

"국체(國體)는 비록 망했어도 국혼(國魂)이 소멸하지 않으면 부활이 가능한데,

지금 국혼인 역사서마저 불태워 소멸하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탄식하던 박은식 선생님은 1911년 5월

독립운동과 역사서 집필을 위해 만주로의 망명을 결정합니다.

 

서간도 지역의 동지 윤세복의 집에 머물며

국혼을 발흥시킬 역사서의 저술에 전력을 다합니다.

또한 이를 재만 한인동포들의 교육 교재로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이 때 저술한 것이

<동명성왕실기()>,<발해태조건국지()>,

<명림답부전()>,<천개소문전()>,<대동고대사론()> 

으로 민족 영웅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뒤 1914년 북경, 천진, 상해, 남경 등을 순방하며

망명 애국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의 방안을 노의했고

그 해 7월 상해에서 동제사()를 결성합니다.

 

 

 

예관 신규식 /  신채호, 신석우, 신규식

 

 

※동제사

중국 관내에서 조직된 최초의 한국 독립운동단체.

중국의 혁명 인사들과교류하면서 신해혁명에도 참여했던 신규식의 주도로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등이 조직했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상해 한국인의

중심 조직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박은식 선생님이 총재로 있던 동제사는

중국의 국민혁명 세력과 연대를 모새가면서 상해에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등 한국 독립 운동의

기반 조성에 주력하였습니다.

 

그 뒤 중국인 동지들의 요청으로 중국어 잡지 <향강()>의 주간이 되었고

이 때 중국 혁명동지회 계열의 인사들과 친료를 맺었다.

 

 

 

잡지 <향강(香江)>  /  <한국통사(韓國痛史)> 표지 

 

 

<향강()>이 폐간 된 뒤엔 다시 상해로 돌아와 

<안의사중근전()>을 집필.

망명 이후 꾸준히 집필하던 <한국통사()>를 완성해

중국인 출판사에서 1915년 간행하였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나라는 형(形)이고 역사는 신(神)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이 독존할 수는 없는 것인가.

이것이 통사를 저작하는 소이이다.

신(역사)이 보존되어 멸하지 아니하면 형(나라)은 부활할 시기가 있을 것이다."

-<한국통사()> 서문

 

 

위의 서문에서 박은식 선생님은

<한국통사()>집필의 이유를 밝히고 있다.

역사를 보존하는 것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전제조건이고 원동력이라

생각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사의 연구와 저술은 선생님에게 있어서

독립운동이었던 것이다.

 

한국통사는 3편 114장으로 구성된 저작으로

1864년 대원군 집정으로부터 경술국치 직후인 1911년까지의

한국 근대사를 다루었다.

 

구체적으로는 일반 정치사와 일제침략사, 그리고 독립운동사를 하나의

체계로 묶어서 기술하고 있다.

 

특히 일제침략사에 초점을 맞추어 대외적으로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잔학성과 간교성을 폭로 규탄하고, 댄내적으로 민족적 통분과 적개심을

유발하며너 동포들의 각성과 반성을 촉구하였다.

이 책을 통해 아픈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고

그 토대 위에서 독립투쟁의 정신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이후에 박은식 선생님은

1915년 북경에서 조직된 신한혁명당에 참여하여

취지서와 규칙을 만들었고, 감독으로 활동했다.

또한 같은 시기 상해에서 신규식와 더불어 대동보국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며 중국 관내 및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연대를 모색했다.

 

그리고 그 토대 위에서 1917년 7월 신규식, 조소앙 등과 함께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여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단결을 통한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의했다.

 

이러한 여러 동지들의 노력에 기반을 두고 세워진 것이

3·1운동 과정에서 민족의 독립 열망과 의지를 담아 민주공화제 정부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육순의 나이에도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을 조직하여

국내의 거족적인 독립운동에 호응했으며 65세의 노인동맹단원이었던

강우규 의사를 파견하여 1919년 9월 2일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에게 서울역에서 폭탄을 던지게 하는 의거를 일으켰다.

 

그 뒤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정부,

서울의 한성임시정부의 통일을 추진하여

그 해 9월 통합 임시정부가 발족하는데 기여한다.

 

이 때 선생님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원로로서 임시정부의 통합을

외곽에서 도왔다.

또한 이 와중에도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발행에 참여했으며 임정사료편찬회를 주도하면서 독립운동사료의

편찬 작업을 도맡아 수행하셨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

 

 

국내의 3․1운동 소식을 듣고 자료를 모아

상해에서 집필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까지의 일제 침략에

대한 한국 민족의 독립 투쟁사를 3․1운동을

중심으로 기술한 책이다.

 

이 책에서 선생님은

역사의 대세와 국제 정세는 일제가 패망하도록 변화하고 있으며,

3․1운동을 계기로 한국 민족의 독립운동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견해를 표현하고 있다.

 

 

"백 번 꺾어도 회절(回折)하지 않고, 열 번 밟혀도 반드시 일어나

현상에 비관하지 않고, 험한 길에 걸음을 멈추지 않아서

최후의 결과는 반드시 승첩(勝捷)을 올릴 것"

 

 


 

이후엔 정무를 등한시한 이승만이 면직되고

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제 2대 대통령으로 취임,

임시 대통령으로서 곧 바로 국무령제 헌법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

이것이 통과된 후 신헌법에 의거하여 그해 8월

만주 독립군 단체인 정의부의 지도자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추천하고서

스스로 대통력직을 사임하셨습니다.

 

 

박은식 선생 서거 보도 기사 /  독립신문(1925.11.2) 박은식 선생 서거사실과 유언 및 장례식 관련 내용

 

 

노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를 정상화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다

인후염과 기관지염이 악화되셨고 사임할 당시엔 병색이 완연하셨다고 합니다.

결국 이로인해 1925년 11월 1일 66세의 일기로 

조국 광복을 위해 열정을 바치셨던 박은식 선생님은

상해에서 서거하셨습니다.

 

 

"우리가 귀중한 독립운동을 기성()하려면 무엇보다도

첫째 전민족의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마지막 순간에도 위의 유촉을 남기신 것을 통해

박은식 선생님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컸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상해 영국 조계지의 정안사에 모셔져 있던

선생님의 시신은 서거 68년만인 1993년 8월

신규식, 노백린, 안태국, 김인전 선생 등과 함께 드디어 고국으로 봉환,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일생의 처음과 끝까지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하시고 많은 역사의 기록을 남기신

박은식 선생님을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국혼(國魂)은 살아있다

국교(國敎) 국학(國學) 국어(國語) 국문(國文) 국사(國史)는 국혼(國魂)에 속하는 것이요, 전곡(錢穀) 군대(軍隊) 성지(城池) 함선(艦船) 기계(器械) 등은 국백(國魄)에 속하는 것으로 국혼의 됨됨은 국백에 따라서 죽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교와 국사가 망하지 아니하면 국혼은 살아 있으므로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1915년 『한국통사』의 결론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백암 박은식)

 

 

 

 

https://youtu.be/e1daRe1iVTs

 

 

 

 

 

 

 

서대문 형무소

 

독립운동의 축소판

 

2편

 

 

 

안녕하세요!

서대문형무소 2편으로 찾아왔습니다.

 

2019년 11월 17일인 오늘은

순국선열의 날인데요.

 

순국선열의 날을 맞이하여 그와 관련된

포스팅을 통해 함께 순국선열분들을

기리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서대문 형무소 2편은 각 건물들에 대한 소개해

드리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현재는 서대문형무소 역사실로 사용되고 있는

보안과청사 건물입니다.

 

보안과청사 건물은 1층, 2층에서는 형무소 역사실, 민족저항실을

지하 1층에서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애국지사들을 고문했던

장소로서 고문실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서대문형무소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분들의

수형기록카드로 한 공간을 전시해 놓은 장소입니다.

이 공간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전시관을 둘러보면서 일제가 

독립운동가분들에에 행한 치욕적이고 고통을 줬던 흔적들을

보고 왔기때문에 매우 막막한 기분으로 이 공간을

감상했었습니다. 또한 이 곳에 남겨진

모든 많은 독립운동가분들을 내가 다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에

죄송스러웠고 다시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왔던 것 같습니다.

 

 

 

유관순 열사 / 이육사 시인 수형기록카드

 

 

 

수형기록카드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등록문화재 제 730호

 

일제강점기 시기 그들의 관점에서의 '사상범'이라 분류되었던

독립운도악 분들의 감옥 수감 상황과 일부 수배자와 요시찰 인물을 기록한

낱장의 종이 재질로 된 카드를 말합니다.

 

가로 15cm, 세로 10cm 한장에

앞과 뒷면으로 사진과 신상정보와 수형사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총 6,264매 중 중복된 기록을 제외하면

4,837명, 이 중에서 179명의 여성 독립운동가분들의

수감카드도 발견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기의 가장 중요하게 치급했던 죄는

식민지 체제에 반대하고 일제가 구축해 놓은

사회질서를 무너뜨릴 여지가 있는 행위로 인식했던

'사상범죄' 였습니다.

보안법, 소요, 제령7호, 불경, 출판법, 치안유지법,

폭력행위 처벌에 관한 법, 촉발물 취제법,

안녕질서에 관한 법 위반 등이 '사상범죄'로 분류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상범들은 일제의 기준일 뿐

우리에겐 그저 일제의 법률를 위반한

항일 독립 운동가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상정보와 수형사항을 기록해 놓은 것이 바로

수형기록카드입니다.

서대문형무소 1편에서도 언급한 적 있듯이

직업과 신분 성별을 뛰어넘어 모든 대한의 사람들이

대한 독립 운동을 외쳤던 3·1운동 이후

수많은 독립운동가분들이 서대문 형무소로 수감되었습니다.

수형기록 카드 역시도 3·1운동을 기점으로

독립운동가 분들을 관리,감독하기 위한 방편으로

1919년부터 본격적으로 작성되었다고 합니다.

수감자의 사진, 이름, 나이, 보적과 주소, 지문번호 등의 기본신상 정보와

죄명과 형량, 언도 재판소, 입출소일, 집행감옥 등이

수형기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수형기록카드는 독립운동가 분들 중

국가유공자로서 서훈 받지 못하신 분들을 찾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시로 배화여학교에서 3·1운동 1주년 기념 독립만세운동을 펼쳐

수감 되셨던 김경화, 박양순, 성혜자, 소은명, 안옥자, 안희경이란 성함을 가지신

6분의 독립운동가 분들입니다.

6분의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최근 카드를 통해서 발견한 행적이

적극적으로 제시 되어 2018년 8월 15일 국가 유공자로서 당당히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수형기록카드가 앞으로의 독립운동사를 연구할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으며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보관해야 할

자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독립운동가분들이 역사의 기록으로 한자로 남아

전해지길 간절히 바래봅니다.

참고자료 : [일제강점기 작성된 독립운동가들의 수형기록, 문화재로 다가오다]

박경목,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장

 

 

 

 

 

 

 

서대문형무소 역사실 지하로 내려가면

지하 고문실로 사용했던 공간으로 갈 수 있습니다.

독립운동가분들을 잔혹하게 고문하며 고통을 주었던

고문이 이루어졌던 곳을 모형으로 재현해 놓은 곳인데요.

이 곳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분들이 취조를 당하고 견디기 힘든

온갖가지 고문들을 당하고 버텨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악명높은 지하고문실이라 수감자들 사이에서 불렸다고 합니다.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과 독립운동 세력을 말살하기 위해서

잔혹하게 취조하고 고문과 구타를 일삼았습니다.

이러한 폭력은 역사적으로 일본이 우리나라로부터 문화를 전수받았고

정치·사상적으로도 우리보다 우수하지 못했다는

열등의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한국인들을 지배하며 유화책을 쓸 수 없었고

무차별적인 폭력을 사용하여 한국인들을 탄압했던 것입니다.

 

 

 

 

 

취조를 하면서 자행한 고문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동료들의

비명조리를 들리도록 구금실과 취조실을 배치하여

심리적인 고통과 공포를 의도하고

물고문, 손톱찌르기고문, 상자고문 등의 잔혹한 고문들로

독립운동가분들의 신체와 정신 모두를

간사하고 잔혹하게 괴롭혔습니다.

이러한 고문으로 인한 흔적과 고통은

독립운동가분들에게 영원히 상처로 기억될 정도록 악랄했습니다.

물리적으로 당한 폭력으로 신체에 남은 흔적

정신적 모멸감으로 뚜렷이 세겨진 정신적 폭력으로 인해서

독립운동가분들은 감옥에서 나와서도

장기 파열과 허파에 물이 차는 흉막염, 뇌진탕 등의 병마에 시달렸습니다.

 

 

 

 

 

 

 

지하독방에 갇힌 독립운동가분들의 모형을

보았을 때, 옆에서 곳곳에서 동료들이 고문을 당하며

고통스러워 하는 소리를 들으며 어떠한 생각을 하고

버티셨을까 한참 생각해 봤습니다.

공포와 심리적 압박감 속에서도 많은 분들이

독립이라는 의지를 꺽지 않고

지금은 생각조차 하지 못할 그 고통을

감내해야 했을 많은 이름 모를 분들을 기억하고 존경하자는 마음을

가슴 한편에 묻었습니다.

 

 

 

 

 

 

 

독립운동가 분들이 당했던 벽관고문이

체험할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초등학생인 동생이 들어가도 답답하고 좁은 곳이었던

장소였는데 성인 남성과 여성이 들어가기도 힘든 곳에서

심지어는 지금은 설치되어있는 작은 창조차도 없었다는

사실에 더 분노했던 장소였습니다.

실제로 체험을 하고서 보는 것은 더욱

큰 분노와 슬픔을 가지고 왔었습니다.

어둡고 좁은 그곳에서 마치 관에 누워있는 것과 같은

심리적인 고문을 자행한 벽관 고문.

실제로 고문을 당하신 한 독립운동가 분의 생생한

고문 육성 기록을 서서 많은 사람들과 보면서야

먼 역사가 아닌 우리 바로 가까이에서 일본에 의해

자행되어던 고통과 분노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배우면서도 멀리 느껴졌던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소름돋으며 신경하나하나에 세겨넣었던 그런 장소였습니다.

제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참담한 심정으로 읽었던 기록 중 하나를 남겨봅니다.

 

···(전략) 얼마 뒤 잡혀 들어온 공산당원 송봉우는 이른바 '비행기 태우기'를 당했다.

비행기를 태운다는 말은 두 손은 뒤로 수갑을 채워 묶고 여기에 밧줄을 이어 천장에 매어다는 것으로 보통 한두 시간씩 계속하곤 했다.

이렇게 하고 난 뒤 뒤로 묶여 굳어진 팔을 잘못내리면 곧잘 부러지곤 했기 대문에 이때에는 두팔을 전문으로 내려주는 잡역이 옆에서 거들어 주었다.

이밖에도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된 것으로 벗겨놓고 가죽채찍으로 매질하는 것, 의자에 묶어놓고 고개를 뒤로 젖힌 뒤 코에 고춧물을 붓는다든가,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리고 구둣발로 짓밟는 등의 방법이 있었다. (후략)···


권영준, 『형정반세기』

입으로도 귀로도 머리로도 생각하고 말하기도 힘들정도로

고통스럽고 두려운 그 과정들 속에서도

독립운동이라는 국가와 국민의 염원을 위해

버티고 싸워주신 많은 분들에게

작은 위로와 감사의 인사를 전달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으로 제가 보답할 수는 없지만

많은 분들의 희생과 나아간 발자취를 하나씩

기억하고 찾아 기록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보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곳이었습니다.

 

 

 

 

 

지하감옥실을 관람하고 보안과청사에서 나오면

다음으로 관람하게 되는 곳인

중앙사 건물입니다.

10,11,12옥사와 연결되어서 옥사 전체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2층으로 지어진 건물입니다.

이곳 1층에서 간수들이 사무공간 이용하였고,

중앙사를 통해서 옥사를 출입했습니다.

2층은 전체를 강당으로 꾸며 수감자들을 전향 시키기 위한

교육을 하는 교회당으로 사용했습니다.

 

감옥 소장과 부소장, 간수장, 간수, 작업기사와 보건기사 등 직급별로 통합하여

서대문 형무소를 운영했는데 독립운동가 수감자가 급증하면서

1935년 구치감을 신설하고 감시와 통제가 보다 용이하도록

서무과, 계호과, 작업과, 구치감, 교무과, 의무과의

6개의의 조직을 편성했습니다.

이렇게 운영되었던 서대문 형무소에 운영과 수감자 관리,감독의 실무를

맡아 배치된 간수들은 산수교습소에서 교육을 받은 뒤 배치되었고

서대문형무소에 설치된 연무장과 조선총독부 형무관 연습소에서 지속적인 훈련을

받으면서 식민지 지배도구의 일선에서 감시와 탄압 역할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적합하도록 교육을 받아 배치되었습니다.

 

 

 

 

제레미 벤담의 파놉티콘

 

 

 

근대식 감옥의 구조는 소수의 인원으로 다수의 대중을 통제하기 위해서

설계되었었다고 합니다.

제레민 벤담에 의해 고안된 파놉티콘(Panopticon) 형태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서대문 형무소도 파놉티콘 형태를 본따 중앙간수소를 중심으로 옥사를 부채꼴 모양으로 배치했습니다.

간수가 한 곳에서 모든 곳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좋도록 설계했던 것입니다.

또한 외벽 담장에는 수감자들의 탈주를 막고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서

높이가 10m나 되는 망루를 설치, 감방 벽면에는 시찰공(감시창)을 뚤어서

수감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였습니다.

이러한 형태는 감방 밖에서 간수들이 감방안을 넓게 감시할 수 있었던 반면

감방안에서는 감방 밖의 상황을 전혀 알 수 없게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다음 3편에서 감방에 대한 자세한 정보와 함께

독립운동가 분들이 어떠한 강제노역을 당했는지

노역이 일어난 공작사를 비롯한 다른 남은 건물들에 대해 

소개해 드리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

국권을 빼앗긴 을사늑약이 이루어진 날.

"나라를 빼앗긴 치욕의 날을 잊지 말고 독립의지를 다지며

순국선열의 희생정신을 영원히 기억하자"

-1939년 11월 2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총회-

오늘이 순국선열의 날인만큼 하루동안은

순국선열들을 위한 추모와 기억을 가지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도 제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하루 보내세요!!

 

그럼 다음 3편에서 다시 만나 뵙겠습니닷!!!!

 

 

 

 

 

 

 

 

 

 

서대문형무소

 

독립운동의 축소판

 

1편

 

근대적 시설을 갖춘 감옥이자

애국 지사들의 피와 애환이 담긴 장소

 

 

 

 

 

 

 

3호선을 타고서 5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옆 작은 공원을 지나 맞이하는 그곳

 

서대문 형무소

 

외관의 붉은 벽돌과 입구로 들어서기 위해

맞이하는 망루와 담장을 볼 수 있다.

 

망루란 방어, 감시, 조망을 위해 잘 보이도록 높은

장소에 설치해 놓는  것이다.

 

재소자들의 탈옥을 막고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설치한 서대문형무소의 망루는

총 6개 중에서 정문과 배면담장 2곳에만 남아있다.

 

그중 입구에 있는 망루는 1923년에 설치한 것이고

뒤쪽의 망루는 1930년에 설치한 것이다.

 

또한 서대문 형무소의 붉은 벽돌은

경성감옥을 뜻하는 '경'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러한 붉은 벽돌은 당시 수감되어있던

애국 지사들의 피와 땀, 노역으로 만들어졌다.

 

애국지사들이 만든 벽돌로 감옥을 만들으면서

당시 일제가 그들에게 얼마나 큰 치욕으로 다가왔을까.

 

 

 

 

 

 

 

서대문 형무소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국권 침탈을 시작하면서

일제가 만든 감옥입니다.

 

자신들에게 대항하는 독립 운동가들의

숫자가 많아짐에 따라 그들 입장의 사상범들을

가둬 둘 공간을 늘릴 필요가 있던 일본은

서대문 형무소의 증축, 확장을 해 더욱 크기를 키웠습니다.

 

 

 

 

출처 : 역사저널 그날 215회

 

 

일제가 서대문 형무소를 만든 곳은

동서로 인왕산과 안산이 둘러싸고

남북으로 무악재가 가로막는 곳으로서

탈옥을 할 수 없는 곳에서 철저히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습니다.

 

현재의 서대문 형무소가 위치하는 곳에서 주변을 둘러보면

산에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주변으로 많은 아파트들과

많은 상가들이 위치해 있어 한참 주변을 둘러보다보면

예전의 이곳에선 얼마나 많은 분들이

힘겹게 버텼을지 상상이 들며 슬퍼졌습니다.

 

 

 

 

 

 

또한 전국적으로 서대문형무소만이 아닌

수많은 형무소들이 세워졌습니다.

전국 곳곳을 감옥화하여 도시 중심에 설치해

일제의 탄압에 대한 독립 운동을 실시할 시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기 위한 위압감을 조성해

전국적으로 공포심을 조성했습니다.

 

 

 

 

출처 : 역사저널 그날 215회

 

 

 

1908년 통감부는 대한 제국 정부에 요청해

한성 감옥을 만들고 이듬해 1909년 기유각서를 통해

대한 제국의 사법권과 감옥 사무권을 빼앗아

이르 자신들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1910년 한일 강제 병합(을사늑약) 이후엔

무단 통치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많아짐에 따라

감옥시설이 부족해졌습니다.

이에 조선 총독부는 1912년 '조선 감옥령'

이라는 법을 만들어 감옥을 늘리거나 크게 짓기로 했는데요.

이때 한성감옥을 고쳐서 크게 지으면서

'서대문 감옥'으로 1923년 다시 증축하며 '서대문 형무소'로 이름이 정해집니다.

 

 

 

 

 

 

 

1935년 5월 새로운 구치감을 증축, 확장하면서

그 넓이가 3,934평에서 16,500평으로 4.2배로 증가

수용 인원 또한 500명에서 2500명으로 5배가 증가합니다.

 

 

서대문 형무소의 확장 공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일제의 탄압이 더욱 심해졌다는 사실과 함께

일제에 대항하는 독립 운동가 분들의 열정이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나왔던 내용 중

중요했던 것을 뽑아 간략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을사늑약

乙巳勒約

 

(=2차 한·일협약)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서

강제로 체결한 조약

 

 

 

 

 

 

강제 조약을 체결해 외교권을 약탈해간 일본으로 인해

외국과의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선 일본의 중개가 있어야만 가능했습니다.

이를 위해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해 통감정치를 실시했습니다.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임명되었습니다.

 

사실상 외교권을 빼앗기면서 국가가 해야할 일을 빼앗겨 버림으로서

주권을 차례로 잃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1907년 7월 19일 고종이 강제로 퇴위를 당하고 얼마 후

1907년 7월 24일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이 체결되면서 군대가 해산 됩니다.

1909년 7월 12일 기유각서를 통해 사법권 감옥사무의 처리권을 박탈당합니다.

1910년 6월에는 경찰권까지 박탈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들에 의해서

1910년 8월 29일 모든 주권을 박탈당하며 경술국치가 이루어지며

식민지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게 됩니다.

이러한 을사늑약에 있어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인물들이 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 / 을사오적(이완용/이지용/이근택/박제순/권중현)

 

1905년 11월 17일 주조선 일본군 사령관과 헌병들과 함께

어전회의에 들어와 강제로 조약체결을 주장한 이토 히로부미.

일본에게 정면으로 반발해야 하는 두려움이었는지 다른 이유였는지

고종 황제는 조약에 반대했지만 건강문제로 인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신하들에게 조약에 관한 일을 떠넘겼습니다.

오늘날의 국무총리인 참정대신 한규설이 마지막까지 반대를 주장했지만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다섯 명의 대신들이 조약서에 서명하면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을사오적입니다.

이들은 이후로도 일제에 나라를 팔아 실속을 체우는데

서슴치 않았고 일본의 은사금, 벼슬을 받고 귀족의 작위를 얻는 등

호위호식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렇게

힘과 사리사욕을 쫒아 나라를 팔아먹는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힘겨웠던 상황에서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대항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으로 헤이그 특사 라고 불리우는

이준, 이상설, 이위종 특사가 있습니다.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을사늑약 이후 고종은 강제조약을 인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기회가 있을 때면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친서를 국외로 보내곤 했습니다.

1906년 평화회의 주창자 러시아 니콜라스 2세가 극비리로

제 2회 만국평화회의 초청장을 보내오게 됩니다.

이에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일본의 침략을 폭로,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헤이그 특사를 파견합니다.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를 작성해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에게 보냈고

신문에 이를 공표해 국제여론을 환기시켰습니다.

 

 

 

헤이그특사를 보도한 [만국평화회의보]

 

 

 

신문기자들과 언론들은 세 특사의 활동에 호의적이었으나,

열강의 대표들은 냉담하였고 이러한 헤이그 특사들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회의 참석이 거부가 되어 버립니다.

이에 격분하여 통분을 누르지 못해

헤이그에서 이준열사가 순국하였습니다.

헤이그 특사가 실직적인 소득을 거두지는 못한 채로

일제의 한국침략을 촉진시키는 구실을 주고 말았지만

세계 열강에서 한국이 주권 회복을 위해 분투하고,

을사늑약의 무효임을 최초로 알렸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이후로도 헤이그 특사는 외국에서 끊임없이 활동했습니다.

 

 


 

 

 


 

무단통치​

(=헌병경찰통치)

 

1910~1919년

 

 

 

데라우치 마사다케(초대 총독)/ 무단통치시기의 헌병경찰

1910년대 무단통치시기는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무력으로 다스린 것을 말합니다.

일제강점기의 무단통치시기는 1910년부터 1919년 3.1운동까지

제복과 칼을 찬 헌병 경찰을 통해서

강압적이고 비인도적인 행위가 이루어 졌습니다.

헌병

경찰의 임무, 모든 정치·언론·집회의 자유 박탈, 민족 신문 발행 금지

애국 지사들의 체포 투옥을 맡았습니다.

심지어 학생들을 교육을 담당하는 교원들 조차도

제복을 입고 칼을 차고 공포심을 조성했습니다.

무단통치를 통해 공포심을 조성하여 일상에서도 두려움을

일상화 시키는 의도였습니다.

또한 초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

이완용 친일 내각으로부터 경찰권을 넘겨받아

헌병·경찰을 동원, 삼엄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한일합방을 성사시켰습니다.

강력한 무단적 식민정책을 성사하여

조선 땅에 공포심을 조성하려했던 사람으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인물입니다.


 

"(임진왜란을 일으켰던)고바야카와,가토,고니시가

세상에 살아 있다면 오늘 밤 떠오르는

저 달을 어떻게 보았을 고"

 

-한국 강제 병합 직후의 축하 연회에서 읊은 시-

 


하지만 이러한 공포심에서도

일본의 무단통치에 대해서 저항하여 국내외에서 활발히

항일 투쟁으로 의병들이 일어났고 전국적인 항거였던 3·1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로 인해 많이 붙잡혀

서대문형무소등 각지역의 감옥들에 수감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서대문 형무소의 간단한 설립 배경과

그와 관련된 역사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았습니다.

 

다음편에서는 서대문 형무소의

건물들에 대한 소개와 이와 관련된 역사 지식을

알려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조금의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합니다.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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