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학의 거인


1859년 9월 30일 황해도 황주 태생의
백암 박은식
일제강점기의 역사학자이자 언론인이었고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일제시기 송상도가 쓴 『기려수필(騎驢隨筆)』에 의하면,
선생의 인상은 중키에 광대뼈가 튀어 나왔으며, 항상 미소 짓는 얼굴에 관후하고 소탈한 성품이었다.
어려서부터 선생은 부친의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는데, 재주가 뛰어나고 시문에 능하여 동네 신동으로 불리었다.
당시의 학문이 과거시험 준비에 치중되어 있었지만, 선생은 이에 구애되지 않고 경학은 물론
제자백가와 불교·기독교의 교리 등도 두루 공부하였다.
그리하여 안중근 의사의 부친 안태훈과 교유함에 이르러서는 이들의 문장을 보고 해서(海西)의 신동이 났다고들 하였다.
특히 선생은 1880년에는 경기도 광주(廣州)로 가서 신기영(申耆永)과 정관섭(丁觀燮) 등에게서 학문을 배웠는데,
이들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문인이었다.
이들을 통해 선생은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의 정치·경제·사회 등 제분야의 개혁론을 섭렵하였고,
나아가 지행합일(知行合一)의 관념 체계 아래 현실 문제에 관심이 깊은 양명학(陽明學)을 연구하며 개혁적 사고를 가지게 된것 같다.
이 같은 사상적 배경이 선생을 양반 관료제 사회의 질서를 고집하는 보수적인 성리학의 틀에만 매어 있지 않고, 근대적인 변화와 발전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개신 유학자로 거듭나게 한 것 같다.
출처 : 공훈전사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박은식 공적상세 中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시면서
박은식 선생님은 본격적인 민족운동에 뛰어드셨습니다.


※독립협회※
1896년 창립자인 서재필이 서울에서 조직한 사회정치단체로
1896년 7월 2일 독립문 건립과 독립공원 조성을 창립사업으로 하여 발족하였습니다.
1896년 7월~1898년 12월에 걸쳐 열강에 의한 국권 침탈과
지배층에 의한 민권 유린의 상황 속에서,
자주국권, 자유민권 자강개혁사상에 의해
민족주의, 민주주의, 근대화운동을 전개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단체 입니다.


독립협회에 189년 가입한 그 해 3월부터
개화 지식인들과 서울 민중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운동에선 문교 분야의 간부급 지도자로서 활동하셨습니다.
※만민공동회※
독립협회가 행한 정치활동의 하나
시민,단체회원,정부관료 등이 참여한 대중집회
1898년 정부의 친러적 정책과 비자주적 외교에 반대하여 일어난 집회.
자주외교와 국정개혁을 주장하는 등의 성과를 보임.
박은식 선생님은 이후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되면서
성균관의 교육 기능을 계승한 경학원의 강사와 관립 한성사범학교의
교사로 봉직하면서 후학 양성에도 이바지 하였습니다.
1904년 7월 양기탁과 영국인 베델에 의해 <대한매일신보>
창간된 후엔 양기탁선생님의 추천으로 주필을 역임하시게 됩니다.
이렇게 백암 박은식 선생님은
언론과 교육활동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셨습니다.
※주필※
= 신문이나 잡지 등 정기간행물의 편집 방향과
기사 게재 결정 여부를 주관하는 최고 책임자.



※대한매일신보※
1904년 7월 18일 서울 전동에서 창간된 일간신문
한국어와 영어 양국어로 된 신문으로
영국인 베델(한국성명 배설)을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양기탁을 총무로 창간된 신문.
또한 서울 서북협성학교와 오성학교가 개설되고
두학교의 교장을 맡아 본격적인 민족교육을 실처하셨습니다.
그리고 서북협성학교의 분교 설립을 적극 추진하여
1908년부터 1909년 말까지 전국 각지에 63개 지교를 설치하셨습니다.
이를 매개로서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한 신교육을 통한
민족의 실력양성운동에 진력하셨습니다.
양기탁, 안창호, 전덕기, 신채호 등이 결성한
전국적인 비밀결사로 계몽운동 단체이자 국권회복운동 단체인
신민회에도 참여하셨습니다.
일제가 민족운동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고
식민통치체제의 안정을 위한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서북학회월보등의
애국적 신문과 잡지를 폐간하였고 민족혼이 담긴 간행물들을
금서로 분류하여 발행과 열람을 엄금하였는데
이에 모든 역사서가 압수, 소각되면서
박은식 선생님은 국민과 차세대의 국민들이 한국인으로써의
정체성과 긍지를 상실하지 않을까 우려하셨습니다.
"국체(國體)는 비록 망했어도 국혼(國魂)이 소멸하지 않으면 부활이 가능한데,
지금 국혼인 역사서마저 불태워 소멸하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탄식하던 박은식 선생님은 1911년 5월
독립운동과 역사서 집필을 위해 만주로의 망명을 결정합니다.
서간도 지역의 동지 윤세복의 집에 머물며
국혼을 발흥시킬 역사서의 저술에 전력을 다합니다.
또한 이를 재만 한인동포들의 교육 교재로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이 때 저술한 것이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
으로 민족 영웅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뒤 1914년 북경, 천진, 상해, 남경 등을 순방하며
망명 애국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의 방안을 노의했고
그 해 7월 상해에서 동제사(同濟社)를 결성합니다.


※동제사※
중국 관내에서 조직된 최초의 한국 독립운동단체.
중국의 혁명 인사들과교류하면서 신해혁명에도 참여했던 신규식의 주도로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등이 조직했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상해 한국인의
중심 조직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박은식 선생님이 총재로 있던 동제사는
중국의 국민혁명 세력과 연대를 모새가면서 상해에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등 한국 독립 운동의
기반 조성에 주력하였습니다.
그 뒤 중국인 동지들의 요청으로 중국어 잡지 <향강(香江)>의 주간이 되었고
이 때 중국 혁명동지회 계열의 인사들과 친료를 맺었다.


<향강(香江)>이 폐간 된 뒤엔 다시 상해로 돌아와
<안의사중근전(安義士重根傳)>을 집필.
망명 이후 꾸준히 집필하던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완성해
중국인 출판사에서 1915년 간행하였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나라는 형(形)이고 역사는 신(神)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이 독존할 수는 없는 것인가.
이것이 통사를 저작하는 소이이다.
신(역사)이 보존되어 멸하지 아니하면 형(나라)은 부활할 시기가 있을 것이다."
-<한국통사(韓國痛史)> 서문
위의 서문에서 박은식 선생님은
<한국통사(韓國痛史)>집필의 이유를 밝히고 있다.
역사를 보존하는 것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전제조건이고 원동력이라
생각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사의 연구와 저술은 선생님에게 있어서
독립운동이었던 것이다.
한국통사는 3편 114장으로 구성된 저작으로
1864년 대원군 집정으로부터 경술국치 직후인 1911년까지의
한국 근대사를 다루었다.
구체적으로는 일반 정치사와 일제침략사, 그리고 독립운동사를 하나의
체계로 묶어서 기술하고 있다.
특히 일제침략사에 초점을 맞추어 대외적으로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잔학성과 간교성을 폭로 규탄하고, 댄내적으로 민족적 통분과 적개심을
유발하며너 동포들의 각성과 반성을 촉구하였다.
이 책을 통해 아픈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고
그 토대 위에서 독립투쟁의 정신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이후에 박은식 선생님은
1915년 북경에서 조직된 신한혁명당에 참여하여
취지서와 규칙을 만들었고, 감독으로 활동했다.
또한 같은 시기 상해에서 신규식와 더불어 대동보국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며 중국 관내 및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연대를 모색했다.
그리고 그 토대 위에서 1917년 7월 신규식, 조소앙 등과 함께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여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단결을 통한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의했다.
이러한 여러 동지들의 노력에 기반을 두고 세워진 것이
3·1운동 과정에서 민족의 독립 열망과 의지를 담아 민주공화제 정부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육순의 나이에도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을 조직하여
국내의 거족적인 독립운동에 호응했으며 65세의 노인동맹단원이었던
강우규 의사를 파견하여 1919년 9월 2일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에게 서울역에서 폭탄을 던지게 하는 의거를 일으켰다.
그 뒤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정부,
서울의 한성임시정부의 통일을 추진하여
그 해 9월 통합 임시정부가 발족하는데 기여한다.
이 때 선생님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원로로서 임시정부의 통합을
외곽에서 도왔다.
또한 이 와중에도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발행에 참여했으며 임정사료편찬회를 주도하면서 독립운동사료의
편찬 작업을 도맡아 수행하셨다.


국내의 3․1운동 소식을 듣고 자료를 모아
상해에서 집필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까지의 일제 침략에
대한 한국 민족의 독립 투쟁사를 3․1운동을
중심으로 기술한 책이다.
이 책에서 선생님은
역사의 대세와 국제 정세는 일제가 패망하도록 변화하고 있으며,
3․1운동을 계기로 한국 민족의 독립운동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견해를 표현하고 있다.
"백 번 꺾어도 회절(回折)하지 않고, 열 번 밟혀도 반드시 일어나
현상에 비관하지 않고, 험한 길에 걸음을 멈추지 않아서
최후의 결과는 반드시 승첩(勝捷)을 올릴 것"
이후엔 정무를 등한시한 이승만이 면직되고
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제 2대 대통령으로 취임,
임시 대통령으로서 곧 바로 국무령제 헌법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
이것이 통과된 후 신헌법에 의거하여 그해 8월
만주 독립군 단체인 정의부의 지도자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추천하고서
스스로 대통력직을 사임하셨습니다.


노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를 정상화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다
인후염과 기관지염이 악화되셨고 사임할 당시엔 병색이 완연하셨다고 합니다.
결국 이로인해 1925년 11월 1일 66세의 일기로
조국 광복을 위해 열정을 바치셨던 박은식 선생님은
상해에서 서거하셨습니다.
"우리가 귀중한 독립운동을 기성(期成)하려면 무엇보다도
첫째 전민족의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마지막 순간에도 위의 유촉을 남기신 것을 통해
박은식 선생님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컸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상해 영국 조계지의 정안사에 모셔져 있던
선생님의 시신은 서거 68년만인 1993년 8월
신규식, 노백린, 안태국, 김인전 선생 등과 함께 드디어 고국으로 봉환,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일생의 처음과 끝까지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하시고 많은 역사의 기록을 남기신
박은식 선생님을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국혼(國魂)은 살아있다
국교(國敎) 국학(國學) 국어(國語) 국문(國文) 국사(國史)는 국혼(國魂)에 속하는 것이요, 전곡(錢穀) 군대(軍隊) 성지(城池) 함선(艦船) 기계(器械) 등은 국백(國魄)에 속하는 것으로 국혼의 됨됨은 국백에 따라서 죽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교와 국사가 망하지 아니하면 국혼은 살아 있으므로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1915년 『한국통사』의 결론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백암 박은식)